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6 사건 (문단 편집) == 여담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VXlIbGDMIY)]}}} || *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두 차례에 걸쳐 10.26 사건에 대해 상세히 다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7jYjDqPEKEU)]}}} || * [[심수봉]]은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한 적이 있다. 특히 박정희에 대해서는 좋게 묘사하지만 본인이 이래저래 수모를 겪은 시절의 대통령인 전두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을 강하게 하는 편이다.[* 영상에 MISS 신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은 [[신재순]].] * [[공민왕]]의 시해 이후 한국에서 600여년만에 발생한 국가원수 암살 사건이다. *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3년 철거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 MBC에서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MBC 가요대제전]]의 전신은 '''10대 가수 가요제'''였는데 원래는 경향신문 합병일을 즈음한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렸었다. 1979년 행사는 10월 27일에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연기되어 12월 31일에 열리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참고로 당시 최고인기가수상은 [[혜은이]]가 수상했다.] * [[박근혜]]는 동생들인 [[박근령]], [[박지만]]과 함께 해마다 10월 26일 박정희 추도식에 참석했으나 18대 대통령 취임한 후에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448&aid=0000122133#Intent;end|불참했다.]] 대통령 신분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하면 자칫 정치 논란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파면 이후에는 징역을 받고 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사면되면서 2022년부터는 다시 참석할 가능성이 생겼다.[* 이렇게 되면 '''10년만에''' 참석하는 것이 되나 건강 악화로 사면받았기 때문에 재참석할지는 미지수이다.] *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79년 10월 20일 신묘한 통찰력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선전을 한다. 이는 김정일의 충복이었던 대남비서 [[허담]]의 저작인 <김정일 위인상> 1권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책에 따르면 김정일은 미국의 주구 박정희의 효용이 다 했으니 곧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용도폐기당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허담은 "박정희사살사건은 음모의 소굴인 미중앙정보국에서 은밀히 조직되였으나 천리혜안을 지니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놈들의 음모의 소굴도 환히 들여다보신다."라고 온갖 후빨주접을 다 떨었다. *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한 후 2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참고로 김재규의 유족들도 이후 상당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사후 유족들을 어느 정도 챙겨줬다고. * 전 [[대전광역시장]] [[홍선기]]는 10.26 사건 당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아산군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 유례 없는 현직 국가 원수 저격 사건이라 사건 전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치사를 박정희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으나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어 보였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02800209203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0-28&officeId=00020&pageNo=3&printNo=17865&publishType=00020|1979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 준공비 제막식에서는 가림막이 벗겨지지 않아 경호원들이 뛰어올라가 낑낑거리며 가림막을 내렸으며[* 이때 준공비에서 가림막이 내려가지 않고 걸려있는건 당시 대한뉴스 등 기록 영상에서도 확인된다.], 행사를 마치고 전용 헬기를 타고 [[도고온천(아산)|도고온천]]으로 갔을 땐 근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사슴]]이 헬기 착륙 소리에 놀라 날뛰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하기도 했다.[* 준공비 제막식 및 사슴 즉사 에피소드 출처: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 김종필도 그의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한남동 음식점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참석자가 '''“오늘 낮 아산 도고호텔 앞마당에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 세 대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렸답니다. 헬기가 착륙하는 소리에 놀라 사육장에서 키우던 새끼 밴 어미 사슴이 날뛰면서 헬기 뒤꼬리 프로펠러에 부딪쳐 죽었다고 하네요.”'''라고 말하자 순간 가슴에 서늘한 것이 스쳐가는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어 등이 오싹했다고 회고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477638|#]] * 김종필은 훗날 10.26 사건을 회고하면서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서울 다동 한 음식점에서 박정희와 함께 유명 역술가인 백운학을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고 한다.[* 백운학은 쿠데타 전 자신을 찾아온 김종필에게 대뜸 '''“당신, 혁명하려고? 그거 성공하니 밀어 붙이시오”'''라고 말하여 김종필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백운학은 박정희에게 '''“각하, (정권이) 20년쯤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고 했고, [[박정희]]는 빙그레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식사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끈을 매던 자신에게 백운학이 슬그머니 다가와 '''“차마 본인한테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는데…. 각하께서 마지막은 퍽 험하게 돌아가실 명운입니다.”'''라고 말했다고 말하며 "백운학의 말이 맞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얘기하지 못했고, 안 맞으면 싱거운 사람이 되겠기에 얘기하지 못했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18년 뒤 참혹한 현실로 찾아왔다."며 회고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524364|[발굴특종] 10·26 그날 …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 박근혜 대통령에게 탄핵 주문을 선고한 [[이정미(법조인)|이정미]] 헌법재판관(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임명 청문회에서 "고등학생 때 원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10.26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70314000291|#]]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일 수 있다. * [[박정희]]의 동거녀 였던 [[이현란]][* [[김호남]]과 이혼하기 전~[[육영수]]와 재혼하기 전 사이에 동거했다.]은 前 동거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하던 중에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다 먹었다고. * 사건 당시 김재규가 사용한 총기인 [[발터 PP|PPK]]와 [[S&W M36|M36 리볼버]]는 증거품으로 보안사령부에서 몰수하였는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6/2009020601140.html|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다.]]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원래 서류상 중앙정보부가 소유한 총기여서 중앙정보부에 반납했다고 나오는데, 정작 [[국가정보원]]에서 확인 결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곡동으로 이전할때 유실된걸로 추정된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의 활동을 장악했고 중정 사무실에 요원들을 배치했다는 미국 문건이 나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214&aid=0000989232|#]] *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 씨가 프랑스 AFP통신 인터뷰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며 '''"그러나 오빠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고자 대통령을 죽이지 않았으며 국가에 반역을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058263?sid=104|#]] * 물론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하마터면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전쟁터가 될 뻔했다.''' 당시 [[서울특별시|서울]]에 있던 [[북한]]의 대남공작원들은 육군병원으로 실려간 위급환자의 차량 행렬로 미루어, 어쩌면 최고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부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정확히 보고했기 때문이다. 쿠테타가 진행 중인 것일 수도 있다는 보고는 덤이다. 그리고 보고를 들은 다음 날인 10월 27일 아침, 북한은 '''전군에 전쟁준비돌입 비상령을 내려 군병력과 항공기를 재배치시키며 대대적인 침공 준비에 들어갔다.''' 천만다행히도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지만 만일 진짜로 휴전선을 넘어왔다면 '''[[6.25 전쟁|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재개됐을 것'''이다. 김재규가 '거사의 이유'라고 주장했던 [[자유민주주의|민주주의]]가 [[인민민주주의|전혀 다른 의미로]] 실현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이 발간한 회고록에도 위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813962|#]] * 사건 발생 42년 후 10월 26일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한 사망일과 노태우의 수인번호 [[1042]]가 주목받아 대중들에게 다시금 이 사건이 환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